시대를 깨우고
교육의 길을 열다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우리나라 교육 문화 출판의 선각자로 알려진 우석 김기오 선생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민중 계몽에 투신한 독립지사였습니다. 해방 후 바로 착수했던 교과서 편찬 역시 일제의 잔재를 없앤 우리말 교과서로 교육 주권을 하루라도 빨리 되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3·1운동에서 신간회 활동까지, 지역 계몽과
민족해방운동의 현장을 지킨 독립지사 우석 김기오 선생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여 뒤인 4월 2일, 언양장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당시 장터 가까이에 살던 열아홉 살의 김기오 선생은 이 거사에 참여하며 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후 독립에 대한 뜻을 지역 계몽과 청년운동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언양에서 이어 온 독립운동은 활동 무대를 양산으로 옮긴 뒤에도 계속됐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힘을 합친 신간회 양산지회 설립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창립 이후 조사연구부 간사를 맡았습니다.
순회강연과 국산품 애용·금연·금주 운동을 전개하며 일상 속 민족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일제는 신간회 활동과 지역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김기오 선생을 지속해서 감시했습니다.
결국 1930년 동대문경찰서에 구금돼 극심한 문초를 받았으며,
이때의 고문은 평생 양다리를 제대로 쓰기 어려울 정도의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신체적 고통 속에서도 교육과 출판을 통한 민족계몽의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신문을 보급하고 지역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언론을 민족의식과 사회운동을 잇는 통로로 삼았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언양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며
본격적인 언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문사 지국은 신문을 보급하고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소식을 취재해 본사에 전달하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신문은 일제의 감시 속에서 세상과 지역을 연결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연대가 필요했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동아일보 울산지국장 박병호, 시대일보 울산지국장 강철 등 지역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6년 3월 7일 울산기자단을 창립했습니다. 기자단은 지역 사회운동의 노선을 단일화하고
이를 방해하는 세력에 공동 대응하는 방안도 모색했습니다.
김기오 선생에게 언론은 단순히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신문 지국 운영과 지방순회 강연을 통해 지역 주민의 현실을 알리고,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사상을
확산하는 사회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습니다. 언론·청년·농촌계몽 활동이 서로 연결되면서
지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됐습니다.
소년회와 청년회를 조직하고 야학과 순회강연을 열어,
다음 세대가 스스로 미래를 준비할 힘을 길렀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청소년들이 식민지 교육과 탄압을 넘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언양소년회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습니다. 소년회는 연극회와 웅변대회,
체육 활동뿐 아니라 배움의 기회가 부족한 이들을 위한 야학도 운영했습니다.
이는 미래 세대를 기르고 교육으로 독립을 준비하려 했던 그의 신념을 보여줍니다.
언양소년회는 이후 언양소년소녀연맹으로 확대·개편됐고,
김기오 선생은 검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활동 무대를 양산으로 옮긴 뒤에는
양산청년회 집행위원과 청년동맹 양산지부장을 맡아 지역 청년운동을 이어 갔습니다.
강연과 야학을 통해 청년들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공동체 의식을 심었습니다.
양산청년동맹은 노동자·농민·여성·소년·청년 등 지역의 다양한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연대 조직으로 발전했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농촌순회강연과 민중문고 설치,
신간회 양산지회 활동 등에 참여하며 배움과 정보가 지역 곳곳에 닿도록 했습니다.
그의 청년운동은 인재 육성을 넘어 지역사회의 자립 역량을 키우는 실천이었습니다.
양산인쇄소에서 대한교과서까지,
우리말 교과서와 잡지를 통해 교육의 주권과 문화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김기오 선생의 출판 활동은 1926년 양산인쇄소를 세우면서 시작됐습니다.
이곳에서는 각종 책자와 인쇄물뿐 아니라 일제에 저항하는 반일 유인물과 선전물도 제작·유통했습니다.
인쇄는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을 넘어 민족의식을 확산하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실천의 수단이었습니다.
서울로 활동 무대를 옮긴 김기오 선생은 1931년 종로에 고학당 인쇄소를 열어 출판사업의 기반을
본격적으로 마련했습니다. 일제 경찰의 탄압과 체포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36년 고학당을 문화당으로 개칭하고 다시 문을 열며 교육출판의 뜻을 이어 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학교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남은 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높았습니다.
김기오 선생은 국민주를 모집해 대한교과서주식회사를 창립하고, 문화당의 건물과
시설을 양도하며 교과서 생산에 나섰습니다. 우리말 교과서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교육 주권을 되찾겠다는 신념이 미래엔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6·25전쟁 중에도 부산과 서울에서 인쇄시설을 운영하며 교과서 발행을 이어 갔고,
1954년에는 전문 인쇄인 양성을 위해 대한인쇄고등기술학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조선교육』
『아동교육』 『소년』 『현대문학』을 창간해 교육과 아동·청소년 문화, 문학 발전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특히 1955년 창간된 『현대문학』은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 월간지로 이어졌습니다.